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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저도 처음엔 예상 밖이었습니다. 수학 개념을 알려주겠다고 수학 동화 시리즈를 한가득 사다 꽂아두는 부모님들을 현장에서 정말 많이 봤는데, 그 아이들이 꼭 수학을 잘하는 건 아니었거든요. 유치원 아이들이 동네 기호를 찾아다니고, 자기만의 기호를 만들고, 교실에 공항을 차리는 놀이를 하면서 수학의 기초인 '약속과 상징'을 몸으로 익혀가는 걸 20년 넘게 지켜본 제가 그 이유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말놀이와 기호탐색: 뇌가 깨어나는 방식
일반적으로 아이의 언어 능력은 책을 많이 읽어주면 자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절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책을 읽어주는 것 자체보다, 읽고 난 뒤에 아이와 무엇을 하느냐가 훨씬 더 결정적이었습니다.
음운 인식(phonological awareness)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음운 인식이란 단어를 소리 단위로 분리하고 조작하는 능력으로, 읽기와 쓰기 발달의 핵심 기초 능력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바나나'를 '나나바'로 뒤집어 말하거나, 소리를 하나씩 빼고 더하는 놀이가 바로 이 능력을 키우는 훈련입니다. EBS에서 진행한 12주간의 책 읽어주기 프로젝트(출처: EBS)에서도 단순히 책을 읽는 것보다 말놀이, 요리 활동 등 책과 연결된 체험이 어휘력과 이해력을 더 크게 끌어올렸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제가 직접 현장에서 써봤는데, 의성어·의태어를 활용한 말놀이 효과는 정말 체감이 달랐습니다. 의성어(onomatopoeia)란 실제 소리를 흉내 낸 단어로, '쨍그랑', '부릉부릉'처럼 소리 자체가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교사가 "부릉부릉!" 하면 아이가 "자동차요!" 하고 맞추는 식인데, 이 짧은 순간에 아이의 청각적 사고가 폭발적으로 활성화됩니다.
기호 탐색도 같은 원리입니다. 유치원 탐색 지도를 함께 만들면서 아이들은 글자 대신 그림과 기호로 의미를 담는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발견했습니다. "이건 카메라 그림 같은데?", "아빠 차 타고 가다가 본 거랑 똑같아!" 하며 스스로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어떤 워크시트도 만들어내기 어려운 장면이었습니다.
특히 학급 캐릭터 기호를 발견한 순간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건 별님반, 이건 햇님반!" 하며 아이들이 기호의 상징성(symbolism)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더라고요. 상징성이란 단순한 그림이나 도형이 특정 의미나 개념을 대표하는 성질을 뜻합니다. 그 이해가 생기고 나서야 아이들은 '나를 나타내는 기호'를 직접 디자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안경을 쓰고 농구를 좋아한다는 아이, 하트와 무지개를 그려 넣는 아이, 소방관 꿈을 기호로 표현하는 아이까지요.
- 음운 인식 훈련: 단어를 소리 단위로 쪼개고 뒤집는 말놀이로 청각적 언어 사고력을 키운다
- 의성어·의태어 활용: 소리와 의미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아이의 어휘 네트워크가 확장된다
- 기호의 상징성 발견: 그림 → 기호 → 글자로 이어지는 문해력 발달의 자연스러운 경로를 만든다
- 책 읽기 후 연계 활동: 읽기 자체보다 읽은 뒤의 상호작용이 발달 효과를 배로 높인다
문해력은 교재가 아니라 놀이에서 완성된다
수학 동화, 한글 동화, 과학 동화를 과목별로 구입해서 읽어주면 그 능력이 쑥쑥 자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도 부모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20년 넘게 유치원 현장에 있다 보니, 그리고 스승의 날에 중학생이 되어 찾아오는 제자들을 보다 보니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아이들의 부모님이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치원에서 잘 키워주셔서 학교에서도 잘하고 있어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치원에서 엄청 잘 놀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은 웃으시는데, 저는 진심입니다.
메타인지(metacognition)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메타인지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스스로 파악하는 사고 능력으로, 학습의 자기 조절 능력과 직결됩니다. 이 능력은 정답을 맞추는 훈련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탐색하는 경험에서 길러집니다. 교실 공항 놀이에서 아이들이 "비행기 타기 전 여기서 가방 검사를 해야 합니다"라고 스스로 룰을 만들 때, 그 순간이 바로 메타인지가 작동하는 장면입니다.
상호작용적 대화(dialogic reading)도 제가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상호작용적 대화란 일방적으로 질문하고 정답을 요구하는 대신, 아이가 스스로 생각을 꺼내도록 열린 질문과 반응을 주고받는 소통 방식입니다. 수영장 기호를 보고 "떨어질 수 있으니까 뛰지 말라는 거 아닐까?"라고 추론한 아이, "여긴 사람이 들어오지 말라는 기호야!"라고 단언하는 아이, 이 대화들은 제가 정답을 가르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아이가 스스로 의미를 구성한 결과입니다.
공항 기호를 만들어 교실에 붙이고, "기호공장"을 열어 필요한 곳에 기호를 배달하는 놀이로 확장되는 과정을 제가 직접 지켜봤는데, 이 흐름의 끝에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한글 글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기호가 의미를 전달하는 약속이라는 걸 몸으로 알고 나니, 글자도 그 약속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KICE)의 유아 언어 발달 연구(출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도 유아기의 문해력은 의미 있는 맥락 속 경험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발달한다고 강조합니다.
제 경험상 이게 정말 핵심입니다. 수학의 기초는 공식이 아니라 '기호에는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이 의미를 전달한다'는 개념입니다. 아이들은 기호 놀이를 통해 이 개념을 교재 없이도 완벽하게 체득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기호 놀이가 수학 기초랑 무슨 관련이 있나요?
A. 일반적으로 수학은 숫자와 연산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수학의 진짜 기초는 '기호에는 약속이 있다'는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 -, =, > 같은 수학 기호도 결국 약속된 상징입니다. 아이들이 기호를 탐색하고 직접 만드는 경험을 통해 이 상징성 개념을 먼저 체득하면, 나중에 수학 기호를 배울 때 훨씬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제가 직접 지켜본 아이들이 그랬습니다.
Q. 말놀이는 몇 살 아이부터 시작하는 게 좋나요?
A. 의성어·의태어를 활용한 간단한 말놀이는 3세부터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음절을 쪼개거나 뒤집는 놀이는 4~5세 무렵이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건 연령 기준보다 아이가 즐거워하는지 여부입니다. 억지로 시키면 오히려 언어에 대한 거부감이 생길 수 있어서, 일상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하는 게 제가 경험상 훨씬 낫다고 본 방식입니다.
Q. 수학 동화책, 사서 읽어주면 소용없는 건가요?
A. 소용없다는 게 아니라, 책만 읽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시각이 제 경험상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책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읽고 난 뒤에 책 속 개념을 놀이로 연결해주는 과정이 있어야 아이 안에서 진짜 개념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책을 읽고 밖에 나가 관련 기호나 사물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Q. 집에서도 기호 탐색 놀이를 할 수 있나요?
A. 충분히 가능합니다. 아이 손 잡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스마트폰으로 기호를 찍어오는 것만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교통 표지판, 가게 로고, 화장실 픽토그램, 엘리베이터 버튼 등 일상이 기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찍은 사진을 함께 보며 "이게 무슨 뜻일까?"라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 핵심입니다. 정답을 알려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의미를 추론하는 과정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론
수학 기초가 걱정된다면, 교재보다 먼저 아이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를 권합니다. 표지판을 찾고, 그 기호가 무슨 약속인지 이야기 나누고, 집에 돌아와 아이만의 기호를 만들어보는 것. 제가 20년 넘게 현장에서 확인한 것은, 이 단순한 경험이 수학 문제집 몇 권보다 아이의 수학적 사고 기반을 훨씬 단단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말놀이, 기호 탐색, 상호작용적 대화. 이 세 가지는 거창한 교육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오늘 저녁 아이와 나누는 일상 속에 이미 다 들어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놀이로 연결하느냐가 전부입니다.